세상을 지배하다




거장의 꿈

100이라는 숫자, 어떻게 보면 작고 어떻게 보면 큰 숫자이다. 하지만 한 영화 감독의 필모그래피 숫자라는 부연이 붙는다면 세상 사람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숫자가 된다. 그런데 거기에 1이 하나 더 붙는다. 한국영화의 거장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올리기>이다. 임권택 감독은 오로지 흥행만을 위해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었던 자신의 예전 영화들이 부끄럽다고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숫자 101은 충분히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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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 스스로 '신인감독의 심정으로 만든 영화'라고 밝히기도 했던 <달빛 길어올리기>는 거장의 새로운 도전과 꿈이 충분히 녹아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극중 대사를 빌리자면 필력이 부족한 사람도 마치 필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화선지가 아니라 붓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드러나 다루기가 매우 까다롭지만 일단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천 년 이상 남게 되는 한지, 임권택 감독은 바로 이 한지와도 같은 인물과 영화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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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길어올리기>는 임권택 감독의 새로운 시도가 눈에 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2000년대 후반까지 후시녹음(그것도 성우로)을 활용하는 등 고전적인 방식을 스스럼없이 고수하던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촌스럽다는 느낌도 종종 받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의 미장센이 한층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첫 번째 디지털 영화라 촬영 현장에서의 작업방식과 후반작업을 통해 영화를 다듬는 과정이 전과 많이 달라졌을 법도 한데 결과적으로 신인감독의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매끄러운 연출을 선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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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순기능

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버릇은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시퀀스의 전환이 있기 전에 장소적 배경을 나타내는 쇼트를 집어넣는다던지, 롱테이크를 활용하여 장면의 사실성을 부각시키는 등 적당히 남아 있는 그의 습관은 다큐멘터리가 가미된 영화의 형식에 리드미컬하게 맞물려 순기능으로 작용한다. 다만 누가 봐도 전문배우가 아닌 카메오들이 롱테이크까지 소화해내며 연기를 하는 모습에서는 약간 얼뜬 부분이 보였는데 그마저도 관대하게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분배가 적절히 분배된 것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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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길어올리기>는 한지를 소재로 한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한지의 생산과정을 본 적이 있어 영화를 이해하기가 매우 수월했는데 이 또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충분히 설명을 하고 있으니 한지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영화를 감상하는 데 아무런 부담이 없다. 그리고 한지라는 소재는 영화의 함의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부담감은 더욱 덜해진다고 볼 수 있다. 그저 한지의 아름다움과 그로 인한 한국적인 영상미를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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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이틀 전 감상한 영화의 결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홍보와 계몽의 색채가 짙은 영화라 그런지 그 속에서 깊이 있는 메시지를 찾는 것도 그렇게 쉽지가 않다. 달빛이 탐나 물을 길어갔다가 달도 함께 담았는데 달빛만 남고 달은 사라져 버린 것 같다. 달빛만 길어올리면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달도 함께 길어올릴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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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맨 Reign [rein] = 통치, 지배; 군림하다, 지배하다, 세력을 떨치다 여행과 사진, 그리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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