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지배하다




잔혹의 미학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보통 온 가족이 함께 보는 따뜻한 이야기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 스릴러영화보다 더 차갑고 더 잔혹한 애니메이션이 한 편 나타났으니... 100% 국산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이다. <돼지의 왕>은 독립 애니메이션의 선두주자라 불리는 연상호 감독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작이다.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이미 독특한 발상과 거침없는 스토리로 주목 받아온 연상호 감독이 그동안 만들어 왔던 단편 애니메이션의 파격적인 스타일을 고스란히 살려내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들고 나타난 것. 독특하면서도 탄탄한 이야기의 구성은 물론 아날로그풍의 사실적인 그림체와 목소리 출연진의 실감 나는 연기가 인상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애니메이션의 목소리 출연진은 흥행과 이슈화를 고려하여 스타급 배우들을 캐스팅하고는 하는데 <돼지의 왕>에서는 양익준, 오정세, 김혜나, 김꽃비, 박희본 등의 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펼친다. 물론 이들도 인기가 많고 연기 또한 곧잘 하는 배우들이다. 하지만 이 배우들을 한국 상업영화의 주류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이들의 목소리 연기는 캐릭터와 제법 잘 들어맞았고, 영화에 몰입하는 순간 더빙이 아니라 만화 캐릭터가 실제로 발성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배우가 중학교 남학생의 목소리 연기를 했기 때문에 다소 어색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반면 양익준과 오정세가 연기한 성인 캐릭터와의 싱크로율은 거의 100%, 매우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목소리 연기 덕분에 만화 캐릭터에서 두 배우의 얼굴이 드러나는 현상을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돼지의 왕>은 선녹음 후제작 방식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제작 방식이지만 애니메이션 산업이 발달한 미국의 경우 선녹음으로 더빙을 진행한 후 목소리 연기자들의 입모양과 연기톤에 맞춰 작화를 진행하는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이러한 방식은 연기자와 캐릭터의 입모양이 일치하기 때문에 관객들의 감정이입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고, 녹음 과정에서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연기나 디테일을 살릴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또한 <돼지의 왕>은 전체의 레이아웃과 애니메이팅을 3D로 잡은 후 그것을 바탕으로 2D 작화를 하는 3D 더미 애니메이션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 돼지의 왕 제작위원회 / 스튜디오 다다쇼 / KT&G 상상마당. All rights reserved.

염세적 파노라마

국내 애니메이션 최초 잔혹 스릴러를 표방한 <돼지의 왕>은 중학생 동창인 정종석(양익준)과 황경민(오정세)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 낸다. 두 남자가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15년 전 겪었던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영화는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교차편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시대적인 배경은 정확하지 않으나 게스 청바지가 유행했던 시절인 것을 봐서 90년대 초반과 현 시점을 오가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5월 개봉하여 인기몰이를 했던 영화 <써니>와 시점 및 교차편집을 이용한 진행 방식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분위기는 백팔십도 다르다. 코믹하고 밝은 느낌으로 낙천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써니>와는 달리 <돼지의 왕>은 염세적인 패턴으로 직조된다.

<돼지의 왕>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온갖 부패한 일들 즉, 학교폭력을 소재로 하여 피해 학생들의 고충과 분노를 사실적으로 그려 낸 작품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약자의 입장에서 기득권층의 부조리와 안이한 사상을 바라보며 함께 분노한다. 다시 말해 과거에도 현재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약자들의 꽉 막힌 현실을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돼지의 왕>의 현실성은 염세적인 결말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지지 못한 자들일수록 단합이 더 잘 될 것 같은데도 정작 기득권층에 비해 연대가 젼혀 이루어지지 않는 하위층의 현실과 그러한 아이러니를 다소 파격적인 결말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 연상호 감독 역시 영화의 묘미와 본질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이러한 결말에 가장 큰 중점을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돼지의 왕>은 피해 의식으로 인한 폭력의 악순환도 보여준다. 피해자였던 종석과 경민이 상대적인 약자인 여자친구와 아내를 자신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증오했던 폭력으로 대한다는 것은 피해 의식이 만들어 낸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결국 <돼지의 왕>은 이러한 현실의 아이러니를 염세적인 패턴으로 직조하여 그렇게 직조된 틀 안에서 희망을 찾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염세적인 성격의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다. 세속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현실의 가장 어두운 면을 드러냄으로써 되레 밝은 현실을 꿈꾸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 본문에 사용된 모든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그 모든 권리는 ⓒ 돼지의 왕 제작위원회 / 스튜디오 다다쇼 / KT&G 상상마당. 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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