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지배하다




Intro

본 리뷰에는 객관성이 상당 부분 결여되어 있습니다. 또한 할 말이 많다 보니 리뷰가 좀 길어졌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스포일러가 없는 리뷰이긴 하나 <일라이>에 관심이 별로 가지 않는 분들은 마지막 세 줄만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리뷰의 핵심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일라이>를 보는 자세

영화에는 크게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기대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기대되는 영화는 다시 두 종류로 나뉜다. 기대치를 충족시켜 주는 영화와 그렇지 못한 영화... 기대가 크면 그만큼 실망도 커지기 마련이다. 반면 기대를 크게 한 덕분에 범작에 그칠 만한 작품이 오히려 걸작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이건 약간 인식론적인 이야기인데 의지와 근성을 갖고 영화를 보다 보면, 다시 말해서 영화의 모든 것을 포착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영화 본래의 재미보다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의 완성도가 어느 정도 받쳐 주었을 때 적용되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영화를 열심히 관람하려는 노력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일종의 영화에 대한 예의라고도 볼 수 있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덴젤 워싱턴이다. 당연히 그의 영화에 거는 기대치는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단순한 기대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의지와 근성, 의도와 노력이 담긴 기대이고, 그렇기 때문에 덴젤 워싱턴의 영화는 언제나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일라이> 역시 마찬가지다.

ⓒ Alcon Entertainment / Warner Bros.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영화 <일라이>에 대한 오해

필자는 <일라이>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좀 풀고 싶다. 우선 일라이의 장르는 SF가 아니다. 액션과 드라마가 적절히 섞인 로드무비라고 볼 수 있다. SF장르의 색깔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영화를 왜 SF로 구분하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포털 사이트에 평점을 매기는 전문가가 아주 당당하게 SF영화라 말하고 있다. <일라이>의 시대적 배경이 2043년이긴 하지만 미래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라고 해서 무조건 SF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사실 브로셔를 보고 안 것이지 영화만 봐서는 204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잘 모르겠다. 아직 영화를 한 번밖에 안봐서 미처 캡처해내지 못한 부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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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라이>는 종교영화가 아니다. <일라이>의 원제는 <The Book of Eli>이다. 여기서 책은 Holy Bible 즉, 성경을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 굳이 연연해 할 이유가 없다. 성경이 아니라 성서가 됐든 불경이 됐든 코란이 됐든 탈무드가 됐든 타나크가 됐든, 어떤 종교의 경전이 되었더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일라이(덴젤 워싱턴)의 믿음이다. 필자는 무교다. 그러나 항상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은 영화 <일라이>의 본질과 다름이 없다. 부디 특정 종교를 비하하면서까지 영화의 본질을 흐트러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특정 종교를 비하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로 인해 영화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이 매우 불쾌하다. 더군다나 불법 다운로드로 <일라이>를 먼저 본 사람들에 의한 변질 아니겠는가. 더욱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다.

ⓒ Alcon Entertainment / Warner Bros.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폼 나는 음영

덴젤 워싱턴이 실제로 어떤 종교를 믿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말콤 X>에서는 수려한 화법으로 이슬람 교도들을 이끌더니 <일라이>에서는 기독교의 순교자로서 죽음을 불사한 여행길에 오른다. 그럴때마다 높다란 장벽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말콤X>에서는 달변의 언술로 장벽을 극복한 반면, <일라이>에서는 호쾌한 간지 액션을 선보이며 장벽을 무너뜨린다. 일라이(덴젤 워싱턴)의 외모에서 풍겨져 나오는 포스 만큼이나 간지나는 액션이다. 또한 그의 연기에서는 짙은 음영이 느껴짐과 동시에 신뢰가 느껴진다. 그의 연기는 언제나 믿음을 준다. 단 한 번도 실망을 안겨 준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일라이>를 보는 자세와 같이 덴젤 워싱턴의 연기를 대하는 필자의 예의있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는 최고의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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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덴젤 워싱턴의 액션 연기를 보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이런 <킬 빌>식의 권법같은 액션은 <일라이>에서 처음 봤다. 그의 액션에도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으며 영화의 전체적인 색감 또한 그러하다. 컬러영화이지만 흑백영화의 느낌도 나는 것이 참 세련된 영상미와 음영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휴즈 형제는 흑인 특유의 정서를 영상에 담아내었고, 흑인 특유의 폼을 액션에 담아내었다. 휴즈 형제의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시퀀스가 하나 있다. 덴젤 워싱턴과 게리 올드만 패거리가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인데, 무려 5분(정확한 시간은 아님)이라는 시간을 단 하나의 쇼트로 끝내버린다. '롱 테이크' 기법을 말하는 건데 컷없이 5분동안이나 이곳저곳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들은 전투의 생동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카메라의 패닝하며 줌인, 줌아웃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촬영기법에는 돈 버제스라는 베테랑 촬영감독의 역량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정말 멋진 장면이다.

ⓒ Alcon Entertainment / Warner Bros.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무소유

사람마다 한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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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는 불경에 있는 말이라고 한다. 일라이(덴젤 워싱턴)는 자신의 경전을 서쪽으로 가져가기 위해 적막한 여행길에 오른다. 그가 가진 경전의 의미는 불경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경전을 소유하고 있으나 소유하지 않고 있다. 그 경전은 하나의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사물(책)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착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오해는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니겠는가. 앞서 말했듯 <일라이>에 대한 오해를 버리고 이해의 문턱으로 들어서려는 의지를 보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일라이>는 썩 괜찮은 영화다. 예의를 갖추고 본다면 걸작으로 다가올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액션, 오락 영화로써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덧) 황금같은 시사회를 양도해주신 정혜진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로또 1등 되실 겁니다.

관련 포스트 : <일라이> 영화 정보 ▶ 더 북 오브 일라이 (The Book Of Eli,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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