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지배하다




Movie Info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이하 백야행)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시나리오 작가의 원작 <백야행>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용의자 X의 헌신>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보통 리메이크 작품이 원작보다 좋은 영화로 평가 받는 일은 '아주 적다'와 '거의 없다'의 중간정도가  될 것 같은데, 이 영화는 그 중간 영역밖에 있는 작품이 될 것 같다. 필자는 아야세 하루카의 팬이지만 <백야행>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아직 보지 못했다. 그리고 원작소설 역시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백야행>이 원작을 뛰어 넘는 작품일 것이라고 말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원작에게 누가 되는 작품은 아닐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있다.

이 영화의 장르는 스릴러를 바탕에 두고 멜로가 첨가된 멜로 스릴러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영화 <올드보이>의 흐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스릴러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고 최민식과 강혜정의 가슴 시리도록 슬픈 사랑이 더해졌던 <올드보이>처럼 손예진과 고수의 사랑 역시 만만치 않은 아픔으로 관객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전체적인 느낌과 배경음악 등을 통해서도 비슷한 부분을 많이 느꼈다. 고수가 추락하는 장면은 윤진서가 다리 위에서 몸을 던졌던 장면의 오마주가 아닐까라는 개인적인 생각도 가져 봤다. 암튼 두 작품이 비슷한 걸 넘어 똑같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 시네마서비스 / CJ 엔터테인먼트. All rights reserved.

천재 감독의 등장

한석규, 손예진, 고수라는 인지도 높은 배우들에 비해 이 영화를 연출한 박신우 감독은 시쳇말로 듣보잡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 봤더니 <백야행>이 장편데뷔작이다. 재학시절 연출한 단편 <금붕어>와  영상원 재학시절 만든 단편 <미성년자 관람불가>로 부산국제영화제 등의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충무로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단편영화로 꾸준히 경력을 쌓았다고는 하지만 1979년생의 이 젊은 감독에게 이렇게 어려운 작품을 맡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제작을 맡은 강우석감독의 선택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박신우 감독은 원작과 똑같지도, 원작에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탄탄하고 재미있게 각색을 해냈고, 135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동안 관객의 몰입을 유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한석규, 손예진, 고수라는 세 명의 스타배우들을 놀라우리 만큼 완벽하게 조련하는데 성공했다.

고수, 고수의 길로

<백야행>에 출연한 조연배우들은 하나같이 적절한 캐스팅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이름은 잘 모르지만 한국영화를 많이 본 관객이라면 얼굴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조연배우들의 모습은 어느 누구도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아역배우부터 성인 연기자들까지 어색함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안정적인 연기로 관객들을 맞이한다. 단순히 연예인이라고만 생각했던 이민정도 비중있는 역할을 맡아 깔끔하고 무난하게 소화해 냈다. 한석규와 손예진의 연기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가 않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들의 명성만큼이나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고수에 대해서는 좀 짚고 넘어가고 싶다. 고수는 연기력보다는 잘 생긴 얼굴이 더욱 돋보였던 배우다. 하지만 그는 <백야행>을 시작으로 연기 고수의 길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우수에 찬 눈빛연기와 삭막함과 살의가 느껴지는 표정연기, 실감나는 베드신까지 다채로운 연기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백야행>은 그가 군복무를 끝마치고 선택한 복귀작으로 알고 있는데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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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기의 이중적인 느낌처럼

OST만 들어 보더라도 <백야행>의 느낌의 절반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악이 좋기도 하지만 적절한 배경음악의 사용으로 분위기를 압도하고, 극중 인물들의 감정을 느끼게 하며 영화에 더욱 빠져들게 만든다. 이것 역시 앞서 이야기했던 <올드보이>와 비슷한 점 중의 하나다. <올드보이>가 잊을 수 없는 명곡들로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 주었듯이 <백야행>도 정말 좋은 음악들을 가득 싣고 있다. <백야행>의 메인 테마곡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게 연주되는 현악기의 독주가 더욱 귓가에 맴돈다. 현악기중에서도 활로 긁어가며 소리를 내는 첼로나 바이올린 같은 찰현악기에서 필자는 이중적인 느낌을 받는다. 으스스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백야행>은 이러한 현악기의 이중적인 느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관객들이 긴장감을 느껴야 할 때와 슬픈 감정을 느껴야 할 때 각각 다르게 등장하는 현악기의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은 상황판단과 감정이입을 돕는 배려라고 느꼈다.

Murder & Year (스포일러)

M&Y는 유미호(손예진)가 오픈을 준비하고 있는 의상실의 이름이다. 영화 속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김요한(고수)과 자신의 이름을 딴 것 같다. 암튼 M&Y가 오픈하는 날은 15년 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김요한의 공소시효가 끝나는 날이다. 하지만 공소시효는 요한에게 큰 의미가 없다. 공소시효가 끝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는 어둠속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햇빛을 보며 걷는 것이 소원이지만 미호라는 그늘의 구속을 피하는 방법은 죽음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버지를 죽인 이후에도 계속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에 공소시효 날짜는 자동적으로 늘어나는 것 아닌가? -_-;;

<올드보이>의 윤진서가 투신하는 장면을 봤을 때 처럼 고수가 추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약간의 전율을 느꼈다. 가슴 시리도록 슬프지만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도 느껴졌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소설의 제목처럼 요한은 날개가 있지만 추락하고야 말았다. 요한과 미호는 자신들의 사랑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비상을 꿈꾸며 날개짓을 했지만 결국 그들은 추락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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