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지배하다




제주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높이 1,950m의 아름다운 우리 강산, 한라산이다. 제주도에는 다섯 번 정도 여행을 갔지만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을 뿐, 한라산에 올라가 본 경험은 아직 없다. 사실 한라산에 오를 기회가 한번 있었다. 첫 번째 제주여행에서 얻은 소중한 기회였다. 한라산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자주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에 꼭 붙잡았어야 했것만 어쩔 수 없이 기회를 저버린 기억이 있다. 당시 한라산 등반이라는 흔치 않은 기회와 맞바꾼 것은 낮잠이다. 한라산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7년의 초여름 어느 날, 간다 안간다 말이 많았던 수학여행이, 그것도 제주도로 가게 됐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더위와 스트레스 속에서 공부를 하던 열여덟 살의 어린 학생들을 설렘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게 만드는 희소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학생들의 일상은 너무나도 지루하고 각박하기만 하다.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에 가서 공부만 하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간다. 잠깐 눈만 붙였다가 다시 또 학교에 가는 반복되는 생활, 그 속에서 합법적인 일탈을 꿈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니겠는가. 물론 9~10시, 조금 늦으면 오후 2~3시에 등교했다가 6시 땡하면 집에 가는 불량 학생에게도 수학여행이 가져다주는 설렘은 유효하다.


제주도 한라산 2011, ⓒ Reignman

제주도 한라산 2011, ⓒ Reignman


불량 학생에게도 설렘이 유효한 이유는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탄다는 것과 난생 처음 제주도 여행을 떠나게 된다는 것, 그리고 난생 처음 사귄 여자친구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한라산 등반을 포함, 3박 4일 일정으로 떠나는 제주 여행, 평소 일탈이 곧 생활인 일탈 마니아게도 군침도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어디 가까운 곳으로 소풍을 가겠다고 한다면 차라리 당구장을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왜 하필 당구장이냐고? 당시에는 PC방이 없었기 때문에...


제주도 한라산 2011, ⓒ Reignman

제주도 한라산 2011, ⓒ Reignman


학교에도 제시간에 나가며 여행에 대한 설렘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불량 학생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쉬는 시간 복도에서 여자친구와 수학여행 계획을 짜고 있는데 갑자기 동급 남학생의 태클이 들어온 것. 친구와 격하게 장난을 치고 있었는지 쫓기던 남학생이 넘어지면서 여자친구와 심하게 부딪히게 된 것이다. 수학여행을 앞두고 불과 며칠 전에 벌어진 상황이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넘어진 여자친구가 일어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진 황당한 상황에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태클 작렬 남학생을 째려본다. 네가 아주 무덤을 파는 구나...


제주도 한라산 2011, ⓒ Reignman


"이 자식을 죽여버려?"

남학생을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가 살짝 어루만져 줄까도 했지만 잔뜩 쫄아서 미안해 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게다가 학교에서의 이미지도 별로 안좋은데 일을 크게 만들어서도 안되는 상황이다. 그래, 그냥 가라. 미안하다는데 어쩔 수 없지. 여담이지만 나중에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이 녀석의 소식을 접했다. 어떤 세금 관련 기사의 사진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는데 어디 세무서에서 일하고 있더라. 세무공무원이라니, 태클 작렬해놓고 성공했구나.


제주도 한라산 2011, ⓒ Reignman


태클을 당한 여자친구의 다리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였다. 골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돌아다닐 수 있는 상황은 못되니 절대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적극적인 권유에 결국 여자친구는 수학여행을 포기하고 만다. 난생 처음 사귄 여자친구와의 제주도 여행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불량 학생은 제주도에 있으면서도 혼자 집에서 아파하고 있을 여자친구 생각에 여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해 계속 신경이 쓰인다. 밤에 잠도 제대로 못잔다. 절대 훌라를 하거나 한라산 팩소주를 마시느라 잠을 못잔 것이 아니다. 불량 학생이라고는 하지만 술은 원래 입에도 못대는 체질이다. 잠도 부족하고 여자친구 생각에 컨디션 난조를 보이는 불량 학생은 결국 한라산 등반이라는 흔치 않은 기회를 낮잠으로 대신한다. 한라산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제주도 곱뜨락아띠 2011, ⓒ Reignman

제주도 곱뜨락아띠 2011, ⓒ Reignman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의 운치를 카메라에 몇 장 담는 것으로 옛 추억을 떠올려 본다. 허나 그것도 잠시, 곱뜨락아띠에 들러 천연비누를 만들어 본다. 가게에 들어서자 달콤한 비누 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천연 재료들의 맑고 시원한 향은 머리를 맑게 해준다. 거기에 천연비누의 촉촉함과 부드러운 감촉이 더해지니 피부마저 급하게 좋아지는 느낌이 든다. 기분이 정말 좋다.

천연비누에는 각종 방부제와 합성세제 등 인공성분이 전혀 없다. 자연에서 얻어진 식물성 오일로 만들어 그만큼 피부에 안전하고, 거품으로 흘러나간 비눗물은 24시간 내에 자연분해되기 때문에 한라산을 비롯한 제주의 아름다운 환경을 해칠 걱정도 없다.


제주도 곱뜨락아띠 2011, ⓒ Reignman

제주도 곱뜨락아띠 2011, ⓒ Reignman

곱뜨락아띠의 소품들.


제주도 서귀포항 2011, ⓒ Reignman

서귀포항에서 바라본 한라산.


제주도 서귀포항 2011, ⓒ Reignman


천연비누 만들기를 끝내고 의자에 앉아 첫사랑과 옛 추억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어든다. 제주도에 두 번째, 세 번째 왔을 때는 한라산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느낄 수 없었지만 이제 깨닫게 되었다. 한라산은 나로 하여금 첫사랑과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특별한 곳이라는 것을... 비록 학창 시절의 풋사랑이라 할지라도 첫사랑의 애틋함이 전해주는 감상은 행복 그 자체이다. 한라산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한 그곳, 한라산이다.

도움 주신 분들 ☞ 제주아띠 (www.jejuatti.com) & 티웨이항공 (www.twaya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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