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지배하다



공중화장실, 일산 라페스타 2011, ⓒ Reignman


지난 주말 고등학교 동창의 아들이 첫돌을 맞이했다고 하여 일산에 있는 한 음식점을 찾았다. 일산은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지만 인생의 3분의 1을 일산에서 살았고, 중·고등학교 모두 일산에서 졸업을 했기 때문에 도시 자체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다. 가장 친한 친구들과 과거에 맺어진 인연을 아직까지 이어오고 있는 지인들이 대거 일산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일산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이유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신도시가 처음 들어서고 일산을 찾았을 때 눈앞에 보이는 건 농경지 뿐이었다. 너무 휑하고 허전한 분위기 때문에 이런 곳에 대규모 신도시가 들어선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후 아파트 단지와 빌라 단지가 들어서고 학교와 병원, 관공서 등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제법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깨끗하고 새로운 도시의 이미지를 함께 구축했다.

일산은 깨끗한 이미지와 함께 교육적으로도 매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도시였다. 이는 일산의 교육 환경을 직접 경험한 당사자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몇몇 고등학교는 짧은 역사에도 유수의 대학교에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며 이른바 명문 학교 대열에 합류했고, 어떤 학교들은 체육, 음악, 미술과 같은 예체능 활동을 장려하며 천편일률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재능 발굴 및 개발에 보다 힘을 쏟는 형식의 교육을 지향하기도 했다. 또한 빠른 취업과 첨단 산업에 투입될 인재들을 육성하기 위한 실업계 고등학교도 많았다.

신도시의 깨끗한 이미지와 좋은 교육 환경 때문에 일산으로 이사를 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차 더 늘어가는 시점이 찾아왔다. 이에 따라 사교육을 위한 학원 역시 많이 생겨났다. 마치 경쟁을 하듯 전국적으로도 인지도가 높은 대형 학원들이 하나둘씩 들어섰고 예체능 및 실업계 학생들을 위한 전문 학원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런데 문제는 교육에 악영향을 끼치는 유흥업소들도 같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나이트클럽과 단란주점들이 간판을 내걸며 지하철역을 장악했고, 학교와 아파트단지 옆에는 대규모 모텔 단지가 들어서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일산은 2000년 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일산을 떠났다.

"격세지감, 씁쓸한 격세지감!"

돌잔치가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일산 라페스타를 찾았다. 뒤풀이를 위해 가볍게 술이라도 한 잔 하기 위한 요량이었다. 라페스타는 일산을 떠난 이후에 생긴 곳이라 잘 모르고 있었는데 서울의 강남 만큼이나 번화하고 화려한 곳이었다. 웨스턴돔과 함께 일산을 대표하는 번화가라고 하는데 주로 10대에서 30대까지의 젊은 사람들이 밤 늦은 시간까지 거리와 술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비교적 조용한 맥주집에 들어가 적당히 술을 마시고 자리를 옮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영하 9도의 추운 날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연말의 주말밤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길바닥에는 사람보다 더 많은 양의 전단지들이 깔려 있었다. 거의 모든 전단지에는 젊고 예쁜 여자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신기한 생각에 바닥을 보며 걷고 있는데 몇 발자국 떼기 무섭게 한 남자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웬 아저씨가 앞을 막고 있었다. 속된 말로 삐끼라 부르는 호객 행위꾼이었다. 술자리를 옮기는데 한 100m 걸었을까? 그 짧은 거리를 걷는데 이런 아저씨가 다섯 명도 넘게 달라붙었다.

이제 막 8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초저녁부터 삐끼들이 달라붙어 안마를 받으라 한다. 친구들은 익숙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삐끼들의 제안을 무시했다. 그리고 2차 술자리로 감자탕집에 들어갔다. 뜨끈한 국물을 마시며 옛이야기를 하는 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술자리는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언제나 행복하다. 추억에 빠져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 어느새 감자탕이 담긴 냄비와 소주병이 바닥을 드러냈다.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섰고 3차 술자리를 위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거리로 나서기만 하면 어김없이 삐끼들이 등장했다.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는 삐끼들을 피해 근처 건물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이내 볼일을 보려고 하는데 소변기와 벽을 도배한 전단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이 아주 묘했다. 제2의 고향이라 여겼던 일산이 언제부터 이렇게 문란해졌고 또, 퇴폐적으로 변한 것인지 아주 좋지 않은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수많은 여자들이 보는 앞에서 볼일을 보니 다소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씁쓸했다. 그리고 불쾌했다.

3차 술자리로 동태 전문점에 들어가 고니알탕을 주문했다. 라면처럼 생긴 생선 내장탕의 맛이 나름 괜찮았다. 친구들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지나고 새벽 1시가 넘어갔다. 밤을 새더라도 이야기를 다 못할 것 같아 술자리를 파하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택시를 잡기 위해 대로변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펑펑 눈이 쏟아졌다. 얼마 전 서울에 첫눈이 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진정한 첫눈이라 느껴질 정도로 많은 양의 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쌓인 깨끗하고 하얀 눈은 바닥에 깔린 전단지들을 모두 덮어 버렸다. 아마 하늘도 보고 싶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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